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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미술시장/2019

차이나가디언 창립 25주년! 회고: 차이나가디언은 어떻게 정련되었나?

차이나가디언 창립 25주년! 회고: 차이나가디언은 어떻게 정련되었나?

(中国嘉德成立25周年回顾嘉德是怎样炼成的)[각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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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차이나가디언 (中国嘉德)25번 째 생일을 맞았다. 그날 차이나가디언 창립자인 천동셩(陈东升, 1957~)이 축하의 메시지를 전했다.


눈 깜짝할 사이 1/4세기가 지나갔습니다! 차이나가디언은 이미 국내외에서 대단한 명성을 누리고 있습니다. 올해 차이나가디언 아트센터의 새로운 건물이 완공됐고, 4개 정기 계절 경매 중 첫 번째 주자인 봄 경매가 시작되었습니다. 세 가지 경사가 한꺼번에 찾아 온 것이지요! 창립자로서 나는 차이나가디언을 둘러보며 여러 이미지를 떠올렸고,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중국인, 차이나가디언인 모두 정말 대단합니다! 세계적 수준의 문화 지표, 창의적 서비스와 전시의 효과는 고전 및 현대 베이징의 면모를 모두 밝게 비추었습니다. 전세계의 컬렉터들이 우리 차이나가디언에 보내준 큰 성원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회사의 일에 참여했거나 현재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 주주님들과 이사진 여러분, 그리고 퇴직한 직원들, 또한 국내외의 우리 직원 여러분 감사합니다! 차이나가디언의 지도층 여러분, 전문가 매니저 여러분, 모든 직원 여러분, 그리고 이들의 가족 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훌륭한 명예는 진심에서 시작되고, 덕과 믿음은 업무에서 비롯된다! (차이나가디언의 사훈: 嘉誉始诚德信在公)


그림 1. 차이나가디언



차이나가디언 국제경매유한공사는 19935월 창립되었다.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중국의 문물문화재 및 예술품을 종합적 경매를 통해 판매하는 회사로서 설립된 것이었다. 오늘날까지 차이나가디언이 경매를 통해 올린 총 매출은 650억 위엔에 달하고, 이들이 경매에 부친 문물문화재 및 미술품의 수는 약 38만 점에 달한다. 25번째 생일을 맞이한 이 회사의 탄생과 정련 과정을 함께 되짚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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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적 영감의 초기 발현


1980년대는 격동의 시대였다. 각종 사조가 등장하여 흐름을 형성했고, 역동적으로 교류가 이뤄졌으며 무수한 젊은이들이 당시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중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훗날 이뤄낸 성취는 사실상 이 10년 동안 그들이 닦아 놓은 성공의 디딤돌을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림 2. 천동셩(陈东升)



1988, 천동셩은 국무원 발전연구센터 부속 잡지 관리세계(管理世界)의 부편집장을 맡았다. 이 시기에 그는 센세이셔널한 기업계의 큰 일을 맡았는데, 이는 중국 500대 대기업 평가 활동을 기획한 것으로, 사실상 그는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의 일생일대의 최종 목표를 명확하게 세울 수 있었다. 이 일을 맡기 이전에 그는 학자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고, 상인이 될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사업적 영감이 떠오르기 시작해 차이나가디언을 창립하기에 이르렀고, 20여년 간 사업을 진행하면서 그는 좌절을 겪은 적이 거의 없다.

 

중국의 기업들과 전세계 500대 대기업들을 비교하면서, 천동셩은 미국의 기업이 500개 기업 중 140개로 1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일본의 기업이 110개로 2위를, 영국 프랑스 독일의 경우 각각 56, 57, 68개 기업이 리스트에 올라와 있다는 사실을 확인, 경제력의 강약 정도와 본국의 다국적 기업의 수가 정비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천동셩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당시 우리 중국인의 목표는 전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최고의 민족이라면 그에 걸맞은 다수의 다국적 기업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나의 다국적 기업도 가지지 못한 민족을 어떻게 우수한 민족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그는 서양의 약 300년의 근현대사는 를 창출해 나가는 과정의 역사였지만, 부 창출의 역사는 사실상 하나의 기업이 창조되는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기업 창조의 영감은 기업가로부터 나오고, 기업가의 영감은 기업 정신에서 비롯되므로 기업 정신이야말로 현대사회의 영혼이자 토대라는 사실을 그는 일찍이 깨달았다.

 

예전에 중국은 그저 위대한 정치가, 문학가, 군사 전문가들만을 치켜세웠을 뿐, 위대한 기업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위대한 기업가들을 사람들이 알게 될 때에 비로소 온전하고 성숙한 사회의 상징이 완성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천동셩은 학자가 되겠다는 이상을 포기하고 기업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고, 언젠가는 세계 500대 기업 중 하나로 손꼽히는 기업을 이끌어 나가고 싶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의 스승이었던 경제학자 동푸렁(董辅礽)의 제안에 따라 천동셩은 동창생 마오쩐화(毛振华)와 함께 공통된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들과 몇몇 동창들은 서양 기업의 세계를 모방하면서도, 남들과는 다른 일을 했다.

 

티엔위엔(田源)이 투자회사인 중국국제 기화공사(中国国际期货公司)를 세우고, 마오쩐화가 1992년 신용평가 회사인 중국 성신 신용관리 주식유한공사(中国诚信信用管理股份有限公司)를 세웠을 때, 천동셩은 경매회사를 세웠다. 우한대학(武汉大学) 동창인 이 세 사람은 완전히 새로운 성격의 사업체를 설립하여 이끌었으며, 각자가 모두 자신들의 분야에서 일인자가 되었다.

 

천동셩에게 있어서 경매사업에 종사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한 일이었다. 공업박물관 설립이 무산되자, 천동셩의 동창 한 명이 그에게 양성완보(羊城晚报)를 찾아 건네주었다. 그 동창생은 신문의 한 기사를 가리키면서 중국에는 5천년의 문명의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소더비나 크리스티 같은 경매사가 없는지 이상하지 않냐 물으면서 우리가 경매회사를 차리면 어떻겠냐 제안했다. 천동셩은 맞장구를 치며 그리하자고 답했다. 그러나 그때에는 장다치엔(张大千)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했고, 경매회사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지식이 없었다. 그저 이런 아이디어가 아주 괜찮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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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가디언의 창립


차이나가디언 국제 경매 유한공사는 19935월 정식으로 창립되었다. 하나의 공백 상태인 분야의 사업을 찾아, 하나의 본보기가 되는 회사를 창립하고, 하나의 업계 발전을 이끌어나가는 것, 이것이 천동셩의 창업 목표였다. 일단 업종을 정하였으니, 어떻게 기업을 운영해 나갈 것인가, 그 방법을 천동셩은 모방에서 찾았다.

 

그림 3. 창립 선포 당시에 찍은 사진(왼쪽에서 일곱 번째 인물이 천동셩)



그가 보기에 중국 경제의 굴기는 두 가지 중요한 단계를 거치게 되어 있는데, 이는 수입대체[각주:2] 및 연해(沿海) 발전이론이다.

 

중국경제의 발전 모델은, 최초에 취했던 수입대체 전략과 연해발전 전략을 거치면서 오늘날 중국 제조업의 발전을 이뤄냈고, 그 후에는 미시적인 기업 모방 전략을 채택하여 중국 경제 및 중국 기업의 향후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실행한 것은 능숙하게, 선도적으로 최고의 모방 본보기를 찾는 일이었다. 거시적 관점에서 후발 국가의 우세함, 기업 발전에 있어서의 후발 이론은 직접적으로 중국 경제의 급속한 성장을 이루어낸 토대이다.

 

천동셩이 보기에 현재 중국의 신흥 민영기업의 절대 다수는 모두 서양에서 최고로 우수한, 최고로 성공한 상업 모델을 찾아 그것을 모방함으로써 발전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미국의 이베이를 모방한 것이 중국의 타오바오(淘宝)이고, 미국의 야후를 모방한 것이 중국의 시나닷컴(新浪)이며, 미국의 구글을 모방한 것이 중국의 바이두(百度)인 것이다. 천동셩은 자신 또한 차이나가디언 경매사와 타이캉 생명보험회사(泰康人寿保险股份有限公司)를 창립하면서 차츰차츰 이러한 이론을 깨닫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1992년 덩샤오핑의 남방담화에 따라 중국의 사회 및 경제는 활기가 넘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각주:3] 이때 35세였던 천동셩은 뜨거운 열정을 바탕으로 창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아이디어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지 않나. 자금 조달 능력이 필요하고, 남이 나를 신뢰하게 만들어야 하고, 약간의 명성도 있어야 하며, 과거 또한 깨끗해야 한다.

 

천동셩은 관리세계에 재직 중일 때 중국 500대 대기업 선정중국공업 40년 성취전을 기획하면서 명성을 쌓을 수 있었고, 일련의 기업가들과 친분을 쌓았으며 이들로부터 신임을 얻기까지 했다. 이로써 훗날 그가 이러한 기업가들을 찾아갔을 때 순조롭게 투자를 유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일주일 만에 20백만 위엔의 자금과 10여 명의 주주를 모을 수 있었다. 경매회사를 설립하여 문물문화재를 경매에 부친다는 기치를 내거는 일은 아주 민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회사는 상호에 문물문화재라는 말을 쓸 수 없었는데, 국가문화재국이 이를 허가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천동셩은 문화부에 가서 시도를 해 보면, 법의 허점을 이용하여 일을 처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경매에 부치는 물품이 동시대 미술품이고 골동품이 아니라면? 그런데 골동품을 경매하지 않고 어떻게 돈을 벌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우한대학 선배인 중앙판공청(中央办公厅: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직속의 사무 기관)의 리쥔(李军)을 통해 문화부 고위 인사를 만나 중국 국제 문화 진품 경매회사를 세우고 문화사업의 번영에 힘쓰겠다 말하려 했지만, 그 당시에 천동셩이 알 수 있는 문화부 인사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문화부는 매우 엄격했기 때문에 천동셩이 재직 중이던 국무원 발전연구센터에 사람을 보내서 조사를 실시하게 했다. 그 법정 대표자의 자격이 적합한지 아닌지, 과거에 정치적으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등을 시찰하게 한 것이다. 그 결과는 예상외로 매우 좋았고, 국무원 발전연구센터의 사람들 모두가 천동셩은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라 했다. 또한 천동셩은 문화부 산하의 한 기관을 찾아, 이렇게 설득했다.

 

당신은 돈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내가 신청을 할 수 있게 도와주기만 하면 내가 당신에게 주식을 주리다.


이렇게 하여 문화부의 상급 또는 하급 기관의 명의로 천동셩의 신청보고가 수리되었고, 이들은 중국국제 문화진품경매 유한공사(中国国际文化珍品拍卖有限公司)’의 설립에 동의했다. 회사는 이후 차이나가디언 국제경매 유한공사(中国嘉德国际拍卖有限公司)로 개명했다. 19933, 9개월의 기다림 끝에 천동셩의 꿈이 이뤄졌고 차이나가디언 국제경매 유한공사가 순조롭게 설립허가를 얻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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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적 모방의 결과


1993518일 정식으로 개업했지만, 1994327일이 되어서야 경매를 진행한 차이나가디언은 1년 동안 한 알의 낟알도 거두지 못했고 임대료와 봉급, 출장비 등의 지출만 늘어갔다. 밑바닥에서 힘든 일을 해 본 적이 없는, 전직 관료인 천동셩이 당시 받았을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사람들은 긴장을 하게 되면 식은땀을 흘리고, 실수를 하게 된다. 나 또한 당시에 심리적으로 항상 식은땀이 났고, 가슴이 아팠으며 매 순간 긴장했고 답답함을 느꼈다. 가족들과 직원들 모두 큰 어려움을 겪었다. 훗날 한 직원이 내게 말하길, 매일 출근해서 사무실에 들어가 웃고 있는 나를 보며 그들 또한 웃었기는 했지만, 내 얼굴이 어두운 날에는 그들 또한 감히 얼굴을 들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나는, 내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을 탓했다. ‘나가서 일을 하세요, 일을 하란 말이에요!’ 당시 문물문화재 상점들은 우리를 나쁜 괴물 대하듯 했고, 우리가 그들의 밥그릇을 빼앗는 자임을 알아챘다. 그들은 우리가 골동품을 판매한다면 그것은 조상을 팔아버리는 일이라 비난했다. 우리 업계의 앞길에 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정부기관과 관계를 맺는 데 많은 수고를 들여야만 했다. <경매법>이 제정되고 나서야 상황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천동셩과 차이나가디언은 첫 번째 경매를 성공적으로 치뤘다. 마치 오스카상을 탄 사람처럼, 그는 동창 티엔위엔(田源), 루지엔(卢建), 마오쩐화(毛振华) 등 감사해야 할 사람이 너무 많다고 했다. 첫 경매에서 낙찰된 경매품 절반 이상을 이 친구들이 구입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때 올린 매출이 14백만 위엔이었고 이중 20%의 커미션비로 1년 동안의 임대료와 임금을 모두 정산하고도 몇 십 만 위엔이 남았다. 그날 밤 천동셩은 축배를 들어 친구들에게 감사를 표했고, 그와 그의 직원들 모두 거나하게 취했다. 천동셩은 그날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술에 취해 소파에 앉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밤을 새운 그날, 차이나가디언의 부총재 또한 술에 취해 그와 함께 바닥에서 잠들어 버린 그날을.

 

천동셩은 그의 인생에서 세 번의 흥분되는 순간이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아버지가 된 순간이다. 아들은 그에게 상상력의 영감이 되었다. 아들이 불량배가 될 수도 있고 대통령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두 번째는 차이나가디언 회사를 창립했을 때이다. 세 번째는 경매가 성공적으로 끝났을 때이다. 특히 세 번째 순간이 가장 흥분되는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때 일 년 동안 받았던 스트레스와 긴장감이 모두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그해 내가 받은 스트레스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농부가 몹시 고생스럽게 농사를 짓더라도, 하늘이 도와주실지 아닐지, 어떤 수확을 거둘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업가에게 있어 첫 번째 거래는 단순히 하나의 거래가 아니라,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다.


그림 4. 1994년 중국서화 및 유화 경매 전경



그러나 이러한 성공 뒤에는 여러 곡절이 있었다. 장성호텔(长城饭店)에 세를 얻은 것 또한 선도적 모방의 한 방법이었다. 천동셩은 장성호텔에 차이나가디언 주식 구입을 제안했는데, 이들이 돈이 부족했던 관계로 임대료를 주식값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당시 장성호텔의 부사장 왕옌난(王雁南)은 골동품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어서 준전문가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고, 천동셩에게 청화 자기에 대해 자주 논하곤 했다. 그런데 이 당시 경매회사의 사장이었던 청동셩 본인은 오히려 청화가 무엇인지 잘 몰랐고, 홍목(红木)이 가장 가치가 있다는 정도의 사실밖에 알지 못했다. 왕옌난은 그에게 가장 값어치가 나가는 재료는 자단(紫檀), 황화리(黄花梨) 등이라고 알려주며 천동셩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천동셩은 그가 전문가라고 확신했고, 그를 영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왕옌난은 차이나가디언의 주주이자 총지배인이 되었다. 당시에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가 차이나가디언의 성공에 기여한 바는 매우 크다. 천동셩이 일궈낸 차이나가디언의 성공 배후에는 리더의 지혜, 그의 사회적 자원에 대한 이해와 장악력 및 운용 능력 등의 토대가 있었지만, 시대의 흐름을 잘 파악한 안목도 큰 역할을 했다. 천동셩은 왕옌난과 간쉐쥔(甘学军)을 영입한 것이 차이나가디언의 성공에 있어 절반의 중요성을 차지한다 말한다. 간쉐진은 그전에 국가문물국(国家文物局사무실의 부주임을 역임한 인물로, 문물문화재에 관련된 일에 정통했고 천동셩의 사업에서 큰 버팀목의 역할을 했다.


그림 5. CCTV의 프로그램 ‘동방시공(东方时空)’에서 ‘동방의 아들’로 선정된 천동셩



1994년 첫 경매를 성공적으로 끝낸 후, 천동셩은 중국 중앙 텔레비전 방송국(CCTV)의 프로그램 동방시공(东方时空)’에서 동방의 아들로 선정되었는데, 이는 각 분야에서 가장 걸출한 인물만이 얻을 수 있는 타이틀이었다(그림 5).

 

당시 일본에서 굉장히 유명했던 NHK사의 프로그램 ‘Who Are You’는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중국을 집중 조명하며 20개의 주제를 골라 가장 신선하고 독창적인 사건 하나와 인물 한 명을 선정했다. 그들이 뽑은 하나의 사건은 베이징 텔레비전 방송국의 프로그램 홍낭(红娘)’으로, 중국에서 연애하는 일이 방송을 통해 소개된다는 점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들이 뽑은 한 명의 인물은 천동셩으로, 중국에서 경매를 통해 미술품 거래를 시작했다는 경천동지할 만한 업적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천동셩은 일본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차이나가디언이 경매에 부친 유화작품 <안위엔(安源)으로 가는 마오쩌둥>이 문혁시기 최후의 중요한 홍색 예술품으로써 6백만 위엔에 거래되며 그해 경매 낙찰품 최고가 신기록을 세워 뉴욕타임즈, 비지니스위크 등에 연일 보도가 되었고, 프로그램에서도 이 일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홍콩의 신문 명보는 전면에 쭝난하이(中南海)[각주:4]에서 출현한 경매관이라는 제목으로 천동셩과 이 경매에 관한 기사를 냈다. 천동셩은 말한다.

 

2000년대에 중국의 국민 영웅이 짱차오양(张朝阳, 인터넷서비스 搜狐 Sohu의 창업자)이었다면, 당시의 나는 그보다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경매사 모집에 있어서도 그는 선도적 모방방식을 적용했다. ‘선도적 모방이 곧 혁신이다라는 생각은 그의 기업 운영 신조이다. 그의 뇌리에 박힌 서양 경매사의 이미지는 매우 강렬한 것이었다. 반백의 고령임에도 매우 민첩한 풍모가 그것이다. “반드시 나이가 좀 있는 사람으로 찾아야 합니다!” 천동셩은 부하직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해 경매사를 모집하기 위해 차이나가디언은 인민일보에 모집 광고를 냈는데, 당시 인민일보1/5 지면 광고비는 4만 위엔에 달했다. 전국에서 30여 명이 지원했는데 그중 젊은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키가 180은 되었고 매우 멋있었으며 영국에서 6년 동안 생활했다고 했다. 천동셩을 만났을 때 그는 매우 위풍당당했고, 자신의 직장은 차이나가디언이 아니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천동셩에게 경매사의 이미지는 나이가 좀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거절했고, 이 젊은 친구는 낙심하여 돌아갔다.

 

마음에 드는 경매사를 찾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갔는데, 어느 날 왕옌난이 천동셩에게 말하길 까오더밍(高德明)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60세이고 이제 막 퇴직했으며 베이징화공연구원(北京化工研究院) 부원장을 역임한 엘리트이며, 문화 대혁명 시기에 적국의 방송국을 도청한 죄로 형장에 올랐던 적이 있는 전설적 인물이라 했다. 그들이 막 만났을 때, 까오더밍이 자리에 앉자마자, 천동셩은 바로 당신입니다!”라고 말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우렁찬 목소리, 온갖 일을 겪은 노련함과 역사감까지 완벽했다. 훗날 그는 동방시공의 첫 장면을 장식했다.

 

천동셩은 자신이 실용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이데올로기적 색채가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2006년 야부리(亚布力) 컨퍼런스[각주:5]에서 한 기업가가 정부의 민간기업에 대한 정책을 비판하자 천동셩은 이에 강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시장경제는 정부와 기업이 공동으로 학습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지, 시장이 나쁘다고 불평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장경제의 요소들에 변화가 있었고, 이들이 나아갈 길은 류용하오(刘永好: 농업, 목축업 분야의 대기업인 신희망그룹 新希望集团의 회장) 등과 같은 초기 기업가들이 걸어온 길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컨퍼런스에서 천동셩은 차이나가디언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문물문화재를 경매에 부치기 시작했을 때, 차이나가디언은 전례 없는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문물문화재를 수출할 수 없다면 어떻게 경매를 진행할 수 있단 말인가?’ 차이나가디언은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이들이 내놓은 경매품 중 해외로 반출할 수 없는 작품에는 별표를 달아 구매자가 이를 정확히 인지하도록 했다. 구입을 하고도 세관에 미술품을 뺏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차이나가디언은 문화재국과의 부단한 소통을 통해 별표 제도를 수립했다. 이는 경매업계 최초로 문서화, 공식화된 제도이며 이후 이들은 문물문화재의 재출국제도, 국가구입제도 등도 만들었다.

 

천동셩이 창립한 사업이 중국에서는 미증유의 사업이었고, 그 사업이 문물문화재를 다루는 일이었기 때문에 매우 민감할 수밖에 없었으며 때문에 해결해야 할 일 또한 끊임없이 발생했다.

 

1996년 시안(西安)에서 열린 첫 번째 전국 문물문화재 업무회의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들, 차이나가디언의 경매품을 모함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부의 업무 분담 담당자는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베이징의 한 개인 사업가가 무슨 더(, 嘉德가 차이나가디언의 중국 이름)라는 회사를 세웠다는데, 어떻게 문물문화재를 버젓이 판매할 수 있단 말입니까?

 

천동셩은 이 이야기를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후 천동셩은 전문화, 시장화를 꾸준히 강조했으며, 이러한 시각을 유지하는 것이 사업의 생명이라 생각하고 행동을 단정히 했으며, 어떠한 실수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트집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이 업계의 모범이 되어야만 했다.

 

1995, 홍콩의 걸출한 컬렉터 양용더(杨永德)의 수중에는 170여점의 치바이스(齐白石) 작품이 있었다. 그런데 크리스티와 소더비 모두 이 작품들을 경매에 부치는 일에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의 컬렉션 중에 일부는 위조품이라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뒤 친구들은 천동셩에게 그를 소개했고 천동성은 자신이 이 작품들을 경매에 부치겠다 마음먹었다.

 

나는 단호하게 이 일을 내가 맡겠다 결심했다. 왜냐하면 이 유명 컬렉터의 컬렉션 전부를 중국으로 되돌아오게 한다면, 이는 정치적으로도 이슈가 될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되자, 천동셩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상대가 70세의 노인이었고, 명문가의 자제였으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평생을 굴러 온 사람이라 기운이 세 보였고, 말솜씨 또한 대단했기 때문이다.

 

양용더는 차이나가디언이 선금으로 절반의 금액을 지불하기를 원했다.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한 그는 늙은 호랑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차이나가디언의 명성도 명성이지만, 내 친구 중 다수가 은행에 근무하고 있으니, 15백만 위엔을 대출 받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천동셩의 눈빛이 흔들렸다. 차이나가디언의 자산이 담보로 삼기에는 부족했던 것이다. 양용더의 작품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은행이 알 리는 만무했다. 돈을 빌리는 일은 스타덤에 오르는 일보다 훨씬 어려웠다.

 

5개월이 지났음에도 한 푼의 돈도 빌리지 못한 천동셩은 건물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이때 비로소 그는 사업을 한다는 것은 귀신과 손잡는 일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티엔위엔이 중기기화공사(中期期货有限公司)를 담보로 삼은 후에야 은행으로부터 15백만 위엔을 대출받을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경매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17백만 위엔의 수입을 거두었을 뿐이었다. 천동셩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래도 손해를 보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하지만 이 일이 예술계에 미친 영향은 상당했고 또 그 영향력이 오래 갔다.


그림 6. 차이나가디언 10주년 행사에서의 천동셩



차이나가디언은 이를 계기로 한껏 자신을 내세울 수 있었다. 다량의 해외 반출 미술품이 국내로 되돌아오는 데 성공했고, 치바이스 시장의 평균가 또한 상승했다.

 

오늘날 치바이스의 작품 가격은 너무나 높지만, 그해에 그의 작품을 팔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고, 손대는 작품 모두가 고가에 팔렸다.

 

훗날 친구들이 천동셩에게 차이나가디언이 성공한 이후 그가 타이캉 보험회사를 세웠으니, 이제는 또 다른 사업을 하고 싶은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평생 다른 일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기업을 세우는 일은 한 젊은이가 세계로 온 힘을 다해 뛰어들어 우승을 하고자 함이니, 평생을 걸고 온 마음과 온 힘을 쏟아야만 한다.

 

그는 두 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셈이고, 또 다른 분야의 우승자가 될 마음은 없다고 한다.







  1. 이 보고서는 중국 미술품 경매 시장에 관해 보도된 소식을 발췌 및 요약 정리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출처를 참고할 것. 소식의 자료 제공 및 원문 번역자는 김새미(베이징사범대학 철학학원 미학전공 박사과정). 陈海著, ‘차이나가디언 창립 25주년! 회고: 차이나가디언은 어떻게 정련되었나?’, 「亚布力中国企业家论坛」, 2019. 5.18. https://www.sohu.com/a/232107080_99947734 [본문으로]
  2. 수입대체는 개발도상국이 관세, 배당액, 외환관리 등에 엄격한 제한을 두어 유관 국내사업의 육성과 보호를 도모하는 수입 조치이다. [본문으로]
  3. 1992년 1월말부터 2월 초까지 덩샤오핑이 천안문 사태 발생 이후 중국 지도부의 보수적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상해 심천 주해 등 남방 경제특구를 순시하면서 개혁을 더욱 심화하고 개방을 확대할 것을 주장한 담화이다. 그해 10월에 열린 제14차 공산당 대표대회 보고서에 거의 전문이 수록되었으며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을 천명하는 데 있어 기초가 되었다. [본문으로]
  4. 베이징(北京)에 위치한 중국 중앙 정부 소재지이다. [본문으로]
  5. 중국기업가 컨퍼런스이며 야부리 컨퍼런스라고도 불린다.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가들의 사상 교류 플랫폼이다. 2001년 헤이룽쟝 야부리라는 소도시에서 처음 열리기 시작, 매년 개최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