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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미술시장/2019

2019년 탄생 백 주년, 새로운 ‘우관쫑 현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2019년 탄생 백 주년, 새로운 우관쫑 현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2019百年诞辰会制造新吴冠中现象[각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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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625, 우관쫑(吴冠中, 1919년 출생, 그림 1)이 베이징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생전 바람대로, 영결식을 거행하지 않았고 추도회 또한 열지 않았다. 우리시대의 거장은 그렇게 조용하고 차분하게 우리를 떠나갔다. 그의 이렇게 소박한 삶과 강한 대조를 이루는 것은, 매우 화려하게 안배된 그의 작품의 시장 분포이다. 세심한 경영과 시대를 잘 타고난 행운을 바탕으로, 우관쫑은 중국예술시장에서 하나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아트론의 표본 경매사의 데이터를 기준으로 집계한 결과, 2018년까지 팔린 우관쫑의 각종 작품은 총 2,047점이었고, 그 거래 총액은 85억 위엔(한화 약 13,7997,500만 원)에 달했다.[각주:2] 유화와 중국화 모두에 능한 대가들 중에서 쉬베이홍(徐悲鸿), 림펑미엔(林风眠)등을 뛰어넘고 1위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림 1. 우관쫑(吴冠中, 1919~2010)



2018년도 ‘20세기 예술가의 작품 거래 리스트에서 우관쫑은 7.7억 위엔의 거래액을 달성하며 2위의 자리에 올랐는데, 이는 요즘 가장 잘 나가는 작가라 할 수 있는 짜오우지(赵无极)의 작품 거래액에 버금가는 수치이다. 미술시장의 20세기 부문에서 흥행 보증수표라 할 수 있는 우관쫑과 짜오우지는 각각 본토와 홍콩 시장을 이끌어가는 주역으로, 이 부문의 두 영웅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예술시장의 시세는 시기상의 적절함과 지리상의 이로움, 그리고 사람들의 화합(天时, 地利, 人和)이 어우러져 결정되는 것으로, 우관쫑 작품의 시세 또한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지난 30년 동안 우관쫑 작품의 미술시장에서의 추세는 경매 시즌마다 다양한 사건들과 결부가 되었는데, 예를 들면 각종 전시의 개최, 우관쫑 전집의 출간(9, 2007, 후난미술출판사. 작품 2,048, 논문 226편이 수록되어 있음), 작가의 사망, 중요 작품의 유출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2019년 우관쫑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후난, 싱가폴, 저쟝, 베이징, 홍콩 등 작가와 깊은 인연이 있는 성() 또는 도시들은 모두 기념 전시회 또는 행사 등의 일정을 잡고 있다. 중국 20세기 예술사에 있어 최후의 대가를 되돌아보기 위함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관심이 쏠리게 된 올해, 2005년을 전후해 중국 예술품 시장에 나타났던 우관쫑 현상이 재연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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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와 먹을 모두 수용한 사의(写意)의 길


기세가 웅장하고 규모가 컸던 20세기 중국예술의 여정에 있어서 우관쫑은 독자적으로 자신의 유파를 만들어 낸 작가이다. 물론 그의 주변에 찬양하는 목소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를 헐뜯고 비방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점은 그가 유화의 본토화중국화의 현대화방면에서 탁월한 성과를 냈고, 오랜 시간 동안 중국예술에 있어서 곤란한 문제였던 중서융합의 의제에 하나의 출로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우관쫑은 수학(修學) 시기부터 중서 두 방면을 모두 배웠다. 1935, 주더췬(朱德群)은 그로 하여금 하던 일과 학업을 포기한 뒤 항저우 예술 전문학교(国立 杭州艺术专科学校, 이하 예전)에 시험을 보고 처음부터 배우도록 했다. 다른 학교들이 국화와 서화로 전공을 구분한 것과는 달리, 항저우 예전은 림펑미엔의 영향을 받아 두 전공을 회화과에서 모두 수용했는데 이는 우관쫑으로 하여금 유화와 중국화 모두를 연구할 수 있게 했다. 여기에서 우관쫑은 림펑미엔, 우다위(吴大羽) 등 서양화파의 교수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을 뿐 아니라, 당시 국내에서는 완전히 생소했던 세잔, 고흐, 고갱, 마티스, 피카소 등 서양의 현대미술 대가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림 2. 1947년 프랑스 유학 시기 베르사유 궁전 앞에 선 우관쫑



1946년 말에 그는 전후(중일전쟁: 1937~1945)에 교육부에서 처음으로 공개 파견한 유학생 시험에 응시했고, 그 다음해부터 프랑스 파리국립미술학원에서 공부를 하게 된다(그림 2). 1950, 우관쫑은 귀국하여 중앙미술학원에서 교편을 잡는다. 그러나 그의 창작관은 당시의 정치에 부합했던 사실주의와 어긋났기 때문에 배척을 당했고, 때문에 여러 학교를 전전해야 했다. 1950년대 말까지 그는 과감하게 자신이 처음에 품었던 예술을 통해 사회를 뒤흔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현실의 인물을 묘사하지 않았으며 무시를 당하더라도 정치에 복무할 수는 없다며 철저하게 풍경화에 몰두했다. 우관쫑은 또한 유화는 유화로 불리고, 국화(国画)는 국화로 불려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채색유화와 수묵은 보통 그 경계가 분명해 보이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그 두 양식이 서로 융합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에 그는 유화의 의상화(意象化, 상징화)된 표현을 수묵화에 도입하여 응용했고, 유화의 본토 사의 정신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1990년대에 그의 작품은 이미 고금의 기법을 자유롭게 구사하였고, 수묵과 유화 모두를 자신의 뜻대로 다루고 있었다. 중서의 융통이라는 업적 이외에도, 우관쫑은 또한 현대 중국의 미술이 경직된 모델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였으며, 용기 있게 할 말은 하고 용기 있게 행동을 실천하는 언론의 솔선자 역할도 수행했다.


현대예술에서 핵심적인 형식미는 중국예술사에서 몇십 년 동안 금기시되었던 주제이다. 19795, 미술지는 우관쫑의 글 회화의 형식미를 게재했는데 이는 가장 먼저 공개적으로 형식미의 문제를 논한 글로서 미술계의 강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813, 그는 미술지에 내용이 형식을 결정하는가?라는 글을 발표하여 더욱 직접적으로 혁명현실주의[각주:3]미술의 창작 공식을 부정하고 형식미의 독립성을 강조했다. 이 글은 화가들의 머리에 깊이 박혀있던 주제 선행[각주:4]의 이론을 전면 부정하였으며, 빠르게 형식 문제에 관한 열띤 토론을 촉발했다. 우관쫑이 예술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하여 힘써 주장했던 예술이 제 1의 기준이고 정치는 제 2의 기준이다라는 구호는 문혁시기 극좌미술의 이정표를 무너뜨렸다. 그는 형식의 관점에서 공공연하게 현대주의 예술을 추앙했고, 1980년대 중기의 신사조 예술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1990년대, 우관쫑은 중국화의 필묵론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견을 서슴없이 내놓았다. 19923, 그는 홍콩의 명보 明报지에 필묵은 제로이다(笔墨等于零)라는 글을 발표하여 중국화 전통의 내부에 깊숙이 파고들어 그 핵심 체계를 다시 살펴보았는데, 이는 90년대 중국미술계에서 한동안 지속되었던 유명한 논쟁을 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우관쫑은 치열한 논란의 중심에서 항상 직언을 하는, 중국미술계에서 풍운아 같은 인물이 되었고, 그의 예술 또한 1990년대에 성숙해져 굉장한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그림 3. 《우관쫑: 20세기의 한 중국화가》, 런던 대영박물관, 1992.



19917, 프랑스 문화부는 우관쫑에게 프랑스 문화예술 최고 훈장(Ordre des Arts et des Lettres)을 수여했다. 19923, 런던 대영박물관은 우관쫑: 20세기의 한 중국화가라는 전시회를 개최했는데, 이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열린 중국의 생존 작가 전시회였다(그림 3). 199911, 중국 문화부는 전례를 깨고 생존작가의 전시를 처음 개최했는데 이것이 1999 우관쫑 예술전이다. 20023, 그는 프랑스 아카데미 데 보자르(Académie des beaux-arts)의 첫 번째 중국 국적 특파원 회원으로 선발됐다. 200312, 중국문화부는 그에게 종신 성취상을 수여했다. 우관쫑은 중국회화가 예술의 성전에서 대중의 광장을 향해 나아가는 길의 중심에 있었고, 최후의 거장이 되었다. 우관쫑은 중국회화의 현대화 조류에서 시대적 문화 및 심미적 심리상태를 리드한 인물이다. 이상의 업적으로 인해 그는 이후 국내외 시장에서 신화적 존재가 되는 데 충분한 근거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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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관쫑의 시장 성장사


1970년대에, 중국 국내에는 아직 미술시장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때문에 우관쫑의 작품이 당시 국내의 심미적 기호와는 약간 다른 이채로운 풍격을 지니고 있었기는 하지만, 시장에서 그 가격이 한 폭에 몇십 위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심지어 때로 그의 작품은 다른 작품을 사는 사람에게 끼워 넣어주는 사은품으로 증정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의 가치를 처음으로 알아본 것은 해외의 컬렉터였다. 1984년부터 우관쭝의 작품은 일본, 미국, 홍콩 등 각지에서 전시되었고 그로써 국제시장의 기초를 광범위하게 다져나갈 수 있었다. 특히 홍콩시장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우관쫑은 1987년과 1989년 홍콩 빠오짜오롱(包兆龙) 화랑과 홍콩 완위탕(万玉堂)에서 두 번의 전시회를 열었는데, 이들은 미디어로부터 충분한 보도와 높은 평가를 받았을 뿐 아니라, 개막식 후에 모둔 출품작이 완판되었다. 일급시장[각주:5]에서 그의 작품을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졌고, 1980년대 말부터는 홍콩의 이급시장에서 그의 작품이 유통되기 시작했다. 이때 경매시장에서 다루었던 대부분의 작품은 헐값에 판매되었거나 지인에게 선사되었던 것, 그의 전시나 출판에 도움을 준 기관에 보답의 차원에서 주어진 것이었다.


그림 4. 궈칭샹(郭庆祥)과 우관쫑



1990년대 초, 우관쫑의 유화시장은 홍콩에서 타이완, 싱가폴, 베이징 뉴욕 등지로 확대되었고 이때 그는 중요한 인물 몇 명을 사귀게 되는데, 이들은 이후 우관쫑 작품의 시장에서의 발전에 있어서 복선의 역할을 하게 된다. 1988년 그는 싱가폴 박물관의 초청으로 개인전을 열게 되었는데, 이때 아트 리트릿 뮤지엄(好藏之美术馆, Art Retreat Museum)의 관장 퀴스위텅(郭瑞腾, Kwee Swie Teng, 인도네시아 출신 컬렉터)을 만나게 된다. 퀴스위텅은 이후 다량의 우관쫑의 작품을 구입했는데 이를 계기로 그의 작품은 동남아 및 홍콩 타이완 시장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싱가폴의 사진작가이자 큐레이터인 차이쓰민(蔡斯民)의 컬렉션 쓰민예원(斯民艺苑)과 홍콩의 팡위런(方毓仁: 홍콩의 1세대 화랑주로 우관쫑의 작업을 보조하는 일을 하게 되면서 예술계에 발을 들였고, 30여년 간 화랑업에 종사했다)의 얜갤러리(一画廊, Yan Gallery)는 우관쫑의 전시회를 여러 번 개최했는데, 이 또한 그의 작품이 현지 시장을 개척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편 유명 컬렉터 궈칭샹(郭庆祥)이 관리하는 다롄완다(大連萬達) 그룹[각주:6]의 예술품 컬렉션 야오바오자이(玥宝斋)1993년부터 우관쫑의 수묵화를 다량 구입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중국 본토에서 그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유한 기관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그림 4).

 

차트 1. 우관쫑 작품의 역대 경매시장 교역 추세도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의 국내 미술품 시장이 성숙해짐에 따라 우관쫑의 작품 시장 또한 홍콩으로부터 본토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는데, 이때 국내시장의 문을 두드린 이기(利器)는 수묵화로 2002년에서 2005년 사이에 가격이 급등했다. 2005, 우관쫑은 상하이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었고 비슷한 시기에 우관쫑 전집의 편찬이 시작되어 우관쫑의 시장이 형성되는 데 첫 번째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그해에 우관쫑의 작품 총 240점이 경매에 부쳐졌는데 거래총액은 4.43억 위엔(한화 약 5513,578만 원)에 달했고, 생존작가 중에서 점 당 가격 상승폭이 가장 높았다.[각주:7] 그중 <앵무천당 鹦鹉天堂>3,025만 위엔(한화 약 376,491만 원)에 거래되어 당시 중국작가 작품 중 가장 높은 가격을 기록했다.


2007년에서 2009년에 중국의 미술품시장은 첫 번째 조정기를 거치게 되는데, 우관쫑 작품에 있어서도 이때는 역량을 축적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20106월 우관쫑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앞서 축적한 역량이 폭발하게 되었고, 2010년에 그의 작품 최고가와 거래총액이 모두 갱신됐다. 2011년에는 시장이 갑자기 호황을 맞으면서, 우관쫑 작품의 시장은 이때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정상 궤도에 오르게 된다. 2011년에는 폴리, 한하이, 소더비, 크리스티 등이 모두 우관쫑 전용 경매 또는 우관쫑을 테마로 한 경매를 열어 다량의 작품을 경매에 부쳤는데, 마침 이때 중국 미술품시장은 자본이 가장 활기차게 유통되는 시기로 진입하였다. 이에 우관쫑에 대한 숭배와 존경에 맹목적인 낙관이 더해져, 우관쫑 작품의 시장은 다시 한 번 폭등하게 된다. 그의 유화작품 <양쯔강 만리도 长江万里图>와 수묵화 <사자림 狮子林>이 모두 억 위엔이 넘는 금액에 거래됐고, 한해 동안의 거래총액은 18.4억 위엔(한화 약 3,3909,360만 원)에 달했다.[각주:8] 당시 시장에서의 우관쫑의 추세는 오늘날 아시아시장을 휩쓸고 있는 짜오우지(赵无极)의 열기에 전혀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토대가 완전히 고정적으로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타난 급등세는 이후의 시장의 활력을 과도하게 소모한 셈이었고 2012년 이후 중국미술품 시장이 전체적으로 침체기를 맞게 되면서 우관쫑 작품의 시세 또한 급속도로 떨어져 2010년 이전의 수준으로 되돌아갔으며, 2015년이 되어서야 점차적으로 회복세를 보이게 된다.


이 조정기에 우관쫑 작품은 2011년의 급속도로 상승한 가격체계를 점차적으로 안정화시키게 되었으며, 동시에 컬렉션계와 학계 모두가 우관쫑 작품에 대한 연구 및 발굴을 점차 심화시키면서, 유화가 수묵화를 넘어서 우관쫑 작품의 체계 중에서 더욱 대표성을 띠게 되었다.


 

그림 5. <제비 한 쌍 双燕>, 수묵화 버전, 1988


 




그림 6. <제비 한 쌍 双燕>, 유화 버전, 1994


유화와 수묵화 두 버전으로 제작된 작품 <제비 한 쌍 双燕>2018년 폴리옥션 가을경매에 출품되었는데 1988년 작품 수묵화 버전(그림 5)4,700만 위엔(한화 약 845,389만 원), 1994년 작품 유화 버전(그림 6)9,800만 위엔(한화 약 1762,726만 원)에 낙찰되어 유화와 수묵화의 분명한 가격 차이를 보여주었다.[각주:9] 2016년 그의 1997년 작품 <쩌우좡 周庄>이 홍콩폴리에서 2.36억 홍콩달러(한화 약 419652만 원)에 거래되면서 경매사상 중국유화작품 최고가를 기록했다.[각주:10] 이로써 우관쫑 작품이 시장에서 활기를 되찾게 되면서 그해 거래총액은 10억 위엔을 넘어섰는데, 이때가 2011년에 이은 두 번째 절정기이다. 이때 그의 작품 시세가 오르면서 2011년에 거래되었던 여러 점의 귀한 작품이 시장에 다시 나타나 유통되었고, 여러 해 동안 소장되어 있었던 중요한 작품들도 등장했다. 2018년에는 그의 1975년 작품 <이강신황 漓江新篁>7,417.5만 위엔(한화 약 1255,708만 원)에 팔렸는데 이는 2011년의 거래가보다 약 5,000위엔 더 높은 금액이다.[각주:11] 한편 시장에 처음으로 등장한 1994년 작품 <제비 한 쌍 双燕>이 커미션 포함 1.127억 위엔(한화 약 1832,727만 원)에 거래되어 그의 작품 중 1억 위엔 이상에 거래된 세 번째 작품이 되었다. 중국의 본토 시장이 그를 열렬하게 지지하면서 우관쫑의 유화작품 평균가는 또 한 번 상승했고, 보통 800~1,200만 위엔대에 거래되는 편이다. 시장에서 더 많이 유통되는 수묵화의 경우 평균가가 200~400만 위엔대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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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별 우관쫑 유화작품 분석


우관쫑이 평생 동안 제작한 작품은 매우 다양하고 풍부하고, 시장에서 유통되는 작품의 수량 또한 대단히 많다. 수묵화 시장과 달리, 유화 시장은 늦게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높은 발전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더 빨리 활성화되었다. 2018년 말까지 거래된 우관쫑의 유화작품은 총 435점으로, 전체 거래량의 18.2%를 차지했고 거래액은 37.35억 위엔(한화 약 6,0637,725만 원)에 달해 전체 거래 총액의 42.4%를 차지했다.[각주:12] 유화작품의 평균가는 873만 위엔(한화 약 141,731만 원)으로 그의 작품 전체 평균가의 약 2배 정도에 상당한다. 현재까지 거래된 그의 작품 최고가 탑 10점의 작품 중에서 8점이 유화작품이다. 최근 3년 동안, 우관쫑의 말기 중요 작품이 더욱 많이 시장에 등장하면서 그 작품의 평균가 또한 눈에 띠게 상승했다.

 

 

    차트 2. 2005년 - 2018년 우관쫑 유화작품의 거래 평균가 및 중앙값의 추세 비교도


  

평균가(단위: 만 위엔)

중앙값[각주:13]



차트 3. 시기별 우관쫑의 유화작품 거래 내역 분석표



우관쫑의 유화작품은 대부분 풍경을 묘사한 것이나, 각기 다른 시기의 작품들에 대해 시장은 분명하게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다. 평론가 쟈팡쩌우(贾方舟)의 개괄에 따라 그의 작품 스타일을 수채유채묵채의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유화 풍경화는 1950년대에 시작되어 1960~70년대에 성숙기에 접어들었고 1980~1990년대에 승화의 단계에 진입했다.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그의 유화작품을 1960년대 이전, 1970년대, 1980년대 이후의 세 시기로 나누어서 분석해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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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유화: 발굴의 필요성


우관쫑은 일찍부터 풍경화를 섭렵했는데, 이는 그가 항저우 예전에서 수학할 때 시후(西湖) 주변에서 사생을 자주 연습했기 때문이다. 이후 파리에서 유학할 때에는 더 많은 곳에서 풍경화를 그렸다. 1950년 귀국 후에는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에 풍경화를 업으로 삼아 다수의 수채 및 유화 작품을 제작했다. 1950년대 초, 그는 엄격한 사실주의 기법으로 베이징 곳곳의 거리와 골목을 그렸다. 1950년대 중기에는 그 사생의 범위가 우타이샨(五台山), 샤오싱(绍兴), 징깡샨(井冈山), 루이찐(瑞金), 홍동(洪洞县), 하이난섬(海南岛) 등으로 확대됐다. 1962년까지 그는 잡지 미술에 티베트에서 사생하여 완성한 작품 <타쉬룬포 사원>을 발표했는데, 이는 그를 유명한 풍경화 작가가 되게 하는 데 일조했다. 우관쫑의 초기 유화작품은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고 다수의 작품은 이미 훼손되어버렸다. 때문에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작품의 수량이 많지 않아서 약 40여 점이 거래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의 가격은 우관쫑 성숙기의 작품에 비해 낮은 편이며, 그중 최고가 작품은 2018년 홍콩 소더비에서 2,292만 홍콩달러(한화 약 325,441만 원)에 거래된 1964년 작품 <산촌청설I 山村晴雪I>(그림 7)이다.[각주:14] 한편 경매로 거래된 작품 중 가장 초기의 작품 중 하나인 1947년 작품 <파리풍경 巴黎风景>(그림 8)2018년 베이징 카운실옥션 봄 경매에서 86.25만 위엔(한화 약 14,750만 원)에 거래됐다.[각주:15] 짜오우지나 주더췬이 젊었을 때 명성을 얻었던 것과는 달리, 우관쫑은 대기만성(大器晚成)형의 점오자(渐悟者)라 할 수 있다. 그의 초기 작품은 희소할 뿐 아니라 작품의 체계화 및 컬렉션 또한 부족한 상황이기 때문에 시장이 발굴한 작품의 수량 또한 부족한 실정이다. 때문에 작품의 가격이 비교적 낮은 편인데, 앞으로 대표적인 작품이 발견될 경우 이러한 상황을 돌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림 7. <산촌청설I 山村晴雪I>, 1964

 

 


그림 8. <파리풍경 巴黎风景>,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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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기의 사실주의 작품: 고공행진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이후 우관쫑은 회화, 작문, 교학 부문에서 제재를 받았고 3년 내내 비판을 받았다. 1970, 그는 학원의 교수진 및 학생들과 함께 허베이의 후어루(河北获鹿)에서 소위 재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2년 뒤, 그는 경축일과 휴일에는 그림을 그려도 된다는 허가를 받는다. 그는 논밭에 버려진, 마오쩌둥 어록이 쓰여 있는 칠판을 캔버스로 삼았고, 고향의 버드나무 광주리를 이젤과 화구통으로 삼았으며, 보리밭의 시골집에서 소재를 찾았다. 작품은 진실한 감정과 그윽한 향토적 정서를 가득 담아냈다. 1973, 우관쫑은 베이징으로 귀환되었고, 베이징호텔(北京饭店)에 거대한 벽화 <양쯔강 만리도 长江万里图>를 그리기 위해 양쯔강 연안으로 가서 드로잉을 하게 된다. 1978년까지 그는 쟝쑤(: 江苏), 안후이(: 安徽), 쓰촨(: 四川), 샨동(: 山东), 져쟝(: 浙江), 허난(: 河南), 푸졘(: 福建), 쟝시(: 江西), 후난(: 湖南) 등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다량의 유화작품을 완성했다. 이때 완성한 대작으로는 <영객송 迎客松>, <양쯔강 싼샤 长江三峡>, <1974년의 양쯔강 一九七四年长江> 등이 있다. 현재 우관쫑의 여러 시기 작품 중에서 1970년대 유화작품이 수량도 가장 많고 낙찰률, 거래액, 평균가 등 각종 항목 모두에서 좋은 성적을 보이고 있다. 가장 큰 집산지는 홍콩이고, 가장 높은 가격대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은 베이징이다.


우관쫑의 1970년대 유화작품은 가장 인정을 받는 작품들인데 이는 이 시기의 작품들이 사실성이 강하고, 비교적 국민들의 감상 취향에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관쫑의 예술생애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이 시기 작품들이 가장 높은 성취를 이룩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장 먼저 컬렉팅의 대상이 되고 학술적으로 체계화된 작품들이라는 점에서, 우관쫑의 70년대 유화작품은 2011년 시장의 갑작스러운 호황세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중 대표적인 작품이 <양쯔강 만리도 长江万里图>(1.3억 위엔(한화 약 2329,470만 원)에 낙찰)<무궁화 木槿>(6,325만 위엔(한화 약 1053,302만 원)에 거래) 등인데, 이들이 예상가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거래된 것은 당시 호황세였던 시장 환경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각주:16] 이때 이러한 최고급 가격대의 수준이 너무 높이 올라갔기 때문에 2011년 이후 다시 경매시장에 나왔을 때 가격 상승폭이 높지 않았는데, 반면 이전에 중저가에 거래됐던 작품들은 높은 가격 상승률을 보였다.


차트 4. 우관쫑의 70년대 작품 중 여러 번 경매에 출품된 작품의 경매추세 비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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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의 사의성(写意性) 작품: 시세의 결정자


1973, 우관쫑은 베이징의 회현당(会贤堂) 옛집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그는 집안이 너무 좁아서 큰 규모의 유화작품을 제작 및 보관할 수가 없어서 화선지를 사용하여 큰 수묵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1980년까지 그의 수묵화는 날이 갈수록 성숙해졌고, 그 사의(写意)적 요소가 유화 작품에도 반영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후 그가 다시 출국했을 때 우관쫑의 유화 창작은 경물에 대한 깊이 있는 형상화 또는 구체적 묘사에 한정되지 않고 크로키로 확대되었고, 이는 이후 그의 작품의 대표적 특성이 된다. 1990년대에 우관쫑은 이국의 경관과 민속을 통해 시야를 확대해 나갔는데, 유화의 현대적 전환이 완성되어 감에 따라 그의 작품의 제재 또한 향촌에서 도시로 변화했다. 큰 붓으로 도시의 산수사의(山水诗意)를 표현하면서 추상적 요소가 더 강화되었고, 시각적 이미지화 또한 더욱 두드러졌다. 1990년대 말부터 우관쫑은 다수의 작품에서 고향과 어린시절에 대한 추억을 표현했고 전통 정물이나 인물, 풍경화 개념이 점차 약화되었다. 이를 인슈앙시(殷双喜) 교수는 심상풍경의 경지라 불렀다.


1980년대 이후의 유화작품은 그의 작품 중에서 경매시장에 출품된 수가 가장 많은 부문이다. 거래액, 낙찰률, 평균가 등은 70년대 유화작품보다 다소 낮지만, 최고가 가격대의 작품은 이 시기의 작품이 더 많다. 20162.36억 홍콩달러에 거래된 <쩌우좡> 이외에도 1994년 작품 <제비 한 쌍>, 2002년 작품 <추근고거 秋瑾故居> 등이 낙찰된 작품 중 최고가 탑 텐에 포함되고, 고가의 수묵화 작품 또한 많이 거래됐다. 1990년대 작품은 우관쫑 작품의 승화기로써, 극히 분명한 특색을 보여주고 그 독특한 면모는 우관쫑이 20세기 중국예술사상 중요한 인물로 우뚝 설 수 있게 했다. 때문에 예술사적 가치로 보자면 90년대 작품이 70년대 작품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1990년대에 그의 명성은 이미 높아질 대로 높아져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의 작품 특히 대규모의 작품들은 대부분 중요한 개인 컬렉터들의 수중에 들어가 있다. 때문에 70년대의 작품과 달리 시장에서 유통되는 작품의 수량이 적지 않다. 그중 특히 뛰어난 작품들은 최근 몇 년이 되어서야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높은 가격에 거래되면서 작가의 유화작품 가격 전체가 상승되었고, 새로운 상승기를 만들어냈다. 앞으로의 시세 또한 이 흐름을 탈 가능성이 있다.


최근 항저우 예전을 졸업한 제 2세대 중국의 유화 작가들이 국내외 컬렉터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들은 림펑미엔의 중서융합 사상을 계승하여 유화에서 중국 전통회와의 사의적 요소를 구현하였고, 이들의 작품은 충분한 동양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우관쫑은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걸출한 작가라 할 수 있다. 한편 중국 본토의 구입자들이 우관쫑 작품의 가치를 점점 더 인정하고 있고 그 수요 또한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우관쫑의 작품을 다루는 주력 시장이 홍콩과 동남아에서 점점 더 본토로 이동하고 있다. 본토에서 그의 중요 작품이 출품되는 빈도수도 높아지고 있기에 본토 시장은 점차 안정화되고 있는 중이다. 우관쫑은 뛰어난 인품과 예술의 고결함으로 이미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각지에서 그를 다시금 주목하고 있기 때문에 시장에서도 그의 전성기가 다시 한 번 도래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1. 이 보고서는 중국 미술품 경매 시장에 관해 보도된 소식을 발췌 및 요약 정리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출처를 참고할 것. 소식의 자료 제공 및 원문 번역자는 김새미(베이징사범대학 철학학원 미학전공 박사과정) 리우롱(刘龙), ‘2019년 탄생 백 주년, 새로운 ‘우관쫑 현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雅昌艺术网专稿」, 2019. 1. 11. https://news.artron.net/20190111/n1042014_1.html. [본문으로]
  2. 한화는 2018년 12월 31일의 공시 환율(매매기준율)을 적용하였다. [본문으로]
  3. 중국의 고전 현실주의 또는 서양의 비판적 현실주의와 구분되며, 작가가 무산계급의 입장과 관점, 방법을 이용하여 현실생활을 묘사할 것을 요구한다. (출처: 바이두백과) [본문으로]
  4. 작가가 창작을 진행할 때 사전에 하나의 주제를 정한 다음, 그 다음에 생활의 소재에서 제재를 선택하고 인물을 구상하여 스토리를 만들어 작품을 완성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 주제는 작가가 생활에서 직접 느끼면서 얻은 것이 아니고, 제재의 선택이나 추출의 과정에서 배태하게 된 것도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제는 하나의 추상적 개념 또는 이론으로서, 작가의 창작은 그 창작을 형식의 허울에 걸쳐 놓는 것일 뿐이며, 이성의 요구에 따라 인물과 스토리를 바탕으로 이미지를 펼쳐놓는 것일 뿐이다. 이 이론은 근본적으로 문학창작의 규율을 위배하는 것으로, 이에 따라 창작된 작품은 생기가 없고 무미건조할 수밖에 없으며 생명력을 결여하고 있다. (출처: 바이두백과) [본문으로]
  5. 일급시장이란 예술가로부터 직접 작품을 구입 또는 전시의 형식을 통해 직접 작품을 구입하는 것으로 중개상, 화랑, 아트페어 등을 통한 구입이 이에 해당된다. 반면 이급시장이란 일급시장에서 유통되었던 작품이 다시 매매되는 경로로 중개상, 화랑, 경매회사 등을 통한 구입이 이에 해당된다. [본문으로]
  6. 다롄완다 大连万达: 완다그룹 万达集团은 호텔, 영화관, 레져 스포츠 시설, 쇼핑센터 등을 운영하는 대기업으로 회장 왕지엔린 王健林 또한 유명한 컬렉터이다. [본문으로]
  7. 한화는 2005년 12월 31일의 공시 환율(매매기준율)을 적용하였다. [본문으로]
  8. 한화는 2011년 12월 31일의 공시 환율(매매기준율)을 적용하였다. [본문으로]
  9. 한화는 2018년 11월 29일의 공시 환율(매매기준율)을 적용하였다. [본문으로]
  10. 한화는 2018년 4월 4일의 공시 환율(매매기준율)을 적용하였다. [본문으로]
  11. 한화는 2018년 6월 14일의 공시 환율(매매기준율)을 적용하였다. [본문으로]
  12. 한화는 2018년 12월 31일의 공시 환율(매매기준율)을 적용하였다. [본문으로]
  13. 여기서 중앙값이란 거래된 작품들 가격 전체 항을 이등분한 위치에 있는 값으로, 최고가 가격대 작품 가격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상대적으로 공정하게 보통 작품의 거래가를 추산할 수 있게 한다. [본문으로]
  14. 한화는 2018년 9월 30일의 공시 환율(매매기준율)을 적용하였다. [본문으로]
  15. 한화는 2018년 6월 16일의 공시 환율(매매기준율)을 적용하였다. [본문으로]
  16. <양쯔강 만리도>의 한화는 2011년 11월 19일, <무궁화>의 한화는 2011년 6월 3일의 공시 환율(매매기준율)을 적용하였다. [본문으로]